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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Issue!/막장,대박 사건들 / x파일 /스캔들

형제복지원 사건 실체, 형제복지원 박인근 아들 실로암의집



형제복지원 사건, 처음 듣는 분들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런일이 있었다구? 하면서 믿지 않으실 겁니다.

해외이슈로만 봐오던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니.. 지금의 우리나라가 많이 살기 좋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습니다. 세상에 무시무시 하네요 정말

끝나지 않은 비극 형제 복지원

'부랑자 교화'라는 정부가 만든 시책에 따라서, 당시에 길에서 잠자던 사람.. 술취한 사람.. 냄새나는 사람 등등 3천 5백여 명의 죄 없는 시민이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로 큰 차에 닭처럼 실려서 끌려가 감금과 폭행, 강제 노역 등 끔찍한 인권 유린을 당했던 사건입니다.

이름하여 '형제복지원' 사건.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폭행뿐만 아니라 질병 등으로 사망한 사람만 공식적으로 5백여명..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학살급 사망자를 발생시킨 형제복지원

형제복지원은 당시에 전국 최대의 부랑아 수용시설이었다고 합니다. 부산 형제복지원에서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요상하게 정해놓고, 잡아들이라고 시켜놓았으니 맘놓고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잡아 들여서, 감금하고 강제노역에 동원을 하면서 일을 시켜먹고, 반항 하거나 도망가면 죽도록 패서 병신을 만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형제복지원의 목적은 좋았습니다 부랑자나 걸인 등 갈곳도 먹을것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기술을 가르치거나 먹고살만하게 만들어서 사회에 복귀시키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당시에 엄청난 돈인 연간 20억원의 막대한 예산을 지원받았다고 합니다.

1980년대에 20억원이면… 휴우.. 형제복지원 사건이 1987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88년 대치동 선경아파트가 1억원이었다고 하네요. 한해에 2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네요. 지금 서울 아파트 보수적으로 해서 5억으로 잡고.. 20채면 100억원..

 

 

형제복지원에 왜그렇게 많은돈이 굴러들어간것일까요… 사회복지시설이 '사설교도소화'해 노동력을 착취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생지옥이다니.. 무섭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술한잔 걸치고 너무 많이 먹어서 길에서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저런곳에 끌려갔고, 갇혀서 맞고 일하고..

오랫동안 형제복지원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졌었고, 사람이 죽어도 노출되지 않았던 형제복지원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탈출에 성공한 원생이 신고하면서였습니다.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이 그렇게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보안이 철저했다고 합니다. 경비원 뿐만 아니라 경비견들까지 두면서 누군가가 도망치면 즉시 잡아들였다고 하는데요. 그런 철저한 감시로 인해서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어서 운영이 되었다고 하네요.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을 접수한 검찰은 망원렌즈를 이용한 카메라로 형제복지원 내에서 이루어지는 강제노역과 인권유린의 현장을 촬영하는 등 2개월여의 내사 끝에 현장을 덮쳐 관계자들을 검거했다고 합니다.

 

 

형제복지원에서 고생한 한 원생이 그린 그림

형제복지원에 관해서 수사를 할수록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줄 드러나기 시작했는데요 형제복지원 내에서 강제노역 뿐만이 아니라, 형제복지원 원장 개인사업에 까지 강제동원되어서 하루 10시간 이상 엄청난 노동을 시키고 밥은 밥한그릇이랑 김치쪼가리만 줬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축들이 지내던 축사를 사람이 누을수 있게 만들어놓고 거기서 자게 했다고 하네요. 이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가축만도 못하게 다룬것입니다.

원장인 박인근은 그 엄청난 보조금을 착복했는데요 고급 아파트는 물론이고, 콘도미니엄,골프회원권 등을 구입하며 온갖 사치를 다 누렸으나 기가막힌것이 오히려 복지사업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가 기록원의 사건 기록

매년 국가의 지원을 받는 전국 최대의 부랑인 수용시설이 멀쩡한 사람들을 부랑자로 몰아 보호시설에 감금한 뒤 강제노동을 시키고, 반항하는 이들을 살해하는 등의 범죄가 적발되었다. 부랑인 수용시설의 복지재단 비리, 부랑인들의 인권유린이 사회문제화 된 사건이다. 

 

1. 사건개요

<부산형제복지원사건>은 부산시 진구 당감동의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유린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전국 최대의 부랑아 수용시설로, 이곳에서 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구타로 숨지고 35명이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실체가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 결과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끌고 가서 불법 감금시키고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여 암매장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여 12년 동안 무려 531명이 사망하였고, 일부 시신은 3백~5백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1987년 형제 복지원 사건 박인근

원장 박인근은 매년 20억 원의 국고 지원을 받는 한편, 원생들을 무상으로 노역시키고 부실한 식사를 제공하여 막대한 금액을 착복하였다.

또한, 자신의 땅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하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이 사건으로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비롯한 직원 5명이 구속되었으며, 형제복지원 원장은 1989년 9월 14일에 2년 6월형이 확정되었다.

 

박인근 출소 이후… 형제복지원 박인근 아들 세놈.

박인근이는 출소하고나서 멋지게도 ‘개신교 집사’가 되었다가, 형제복지원을 되찾게 됩니다. 그리고 이름만 바꿔서 사업을 확장하지요.

<재육원(1988년)→욥의 마을(1991년)→형제복지지원재단(2001년)→느헤미야(2014년)> 이런식으로 이름만 바꿔서 계속 유지하고, 나중에 알고보니 그 법인의 규모가 무려 1천억원대.. 큰 건물도 인수하고.. 형제복지원 박인근 아들 중에서 셋째는 ‘실로암의 집’이라는걸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주에 대형 골프장도 있다고 하고.. 나중에 형제복지원 박인근 아들 셋째놈은 보조금 횡령으로 걸려서 징역 3년짜리를 받기도 했습니다.

박인근이도 죄가 있었으나, 뇌출혈로 쓰러진 상태라 재판이 실시되지 않았다고..

 

 

 

형제복지원피해자가남긴글


난1976년 8월 17일 에 태어나 아버지 와 큰누나 작은누나와 함께 1984년도 까지 함께 살았다.
그러나 1984년 아버지의 알콜중독증세로 인해 가정을 꾸릴수 없었던 아버지는 나와함께 작은누나를 형제 복지원이란곳으로 보내게 되었다...일년 후에 데리러 오겠다던 아버지...

 

그당시 형제복지원은 많은 부랑자와 장애인들을 보살펴 준다던 광고를 접하게 된 아버지..
나와 작은누나를 그곳으로 잠시 맡긴다는 생각에 그곳에 보냈었다..

 

하지만...난 작은누나와 그곳에서 3년여를 보내면서 차마 말로 다 표현할수 없을정도의 고문과 기합등으로 지옥같은 생활을 보내야만 햇었다...그곳에서 작은누나는 어른들의 강간등으로 정신질환을 일으켜...지금도 정신병원에서 복역중인걸루 알고 있다....

 

나 역시 그곳에서 죽을고비를 당했었다...그당시 내나이 8살...죽도록 미웠던 아버지가 보고싶을정도로 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당신들은 아는가...8살때의꼬마가 어른들의 손아귀에 멱살을 붙잡혀 이리끌려다니고 저리끌려다니고 눈물이라도 흘리거나 울음소리가 나오면...죽지않을정도로 말그대로 반만죽일정도로 구타를 하였고...

 

어린나이에 살려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나왔던 그시절....살려달라는소리가 크면클수록 더욱더 잦은 매질과 존간나 소리를 들어가면서..물고문을 당해야만 햇었던 나의 유년시절.....그곳에서 생활이 죽을정도로 엄청난 거엿지만...죽지않을정도의 고문이였기에..어느덧 1년이라는 새월은 그렇게 흘러 갓다...하지만 1년후 아버지가 찾으러 오겟다던 시간은 이미 지나간 후였다...그후...3개월여지난 어느날....

 

어떤 아저씨가 세벽 체조 시간때 나에게 조용히 와서 나의이름을 부르며 너가 영태 아들이냐?
라는 말에...난 무척이나 기대 하며...큰소리로 네 맞아요...아버지 어딧어요? 라고 대물었지만.

 

그 아저씨에 말에 난 작은 희망이나마 가지고 있었던 내가 정말 이젠 정말 죽었구나 란 생각을 가지게 되엇다...그아저씨 말에따르면 아버지가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 자고있었는데...형제복지원이라는 차에 실려 이곳에 오고 말았다는것이다...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전부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같은곳에서의 삶을 영원히 보내는거 같앗다...

 

작은누나는 그곳에서 2년여를 버티다가 결국 강간과 구타..고문 등으로 정신이상자가 되었고...1987년 교회당에 예배를 보러 갔을때 일이다...그때...난27소대소속이였다 조장중에 빤빤이 라는 별명을 가진 조장이 내뒤에 앉아있었는데...내어깨를 두드리며 나 도망갈테니까 나중에 나찾으면 그냥 모른다고 해라 라고만 했다.

 

나역시 같히 가고 싶었지만..전에 한원생이 도망가다 잡혀서 엄청난 구타와 물고문 전기빳따 라는 구타에 못이겨 결국 숨을 거둔걸 알고 있던터라 난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뒤도 돌아 보지 못한 상황이였다...예배가 끝난후 모두 정열을 해서 인원을 마춰보는데 빤빠이 조장이 보이지 않았다...하필 조장이 내뒤에 앉아 있어서...난 그날도 죽지 않을정도로 맞았다...

 

우리 소대는 그당시..120명 정도 인걸루 안다...그때 내가 당한 구타는 원생들이 날 때리는것으로 되었다..일명 모다구리라는 것인데....소대안에 보면 중앙은 복도로 되어있고..양옆으로 2층씩 침대로 되어 있다....모두 침대쪽으로 일렬종대로 서있다가 내가 복도 한가운데에 불려 가고

 

내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 쒸우고 소대장이 모다구리라는 말과 동시에 원생들은 날 짓밟았다....
그렇게 얻어맞고 정신을 잃으면 바로 세면장에 끌고가서 팬티만 입혀놓고 한겨울에물고문을 해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그러나 난 끝까지 모릅니다..라고만 외쳐됐었다..

 

그일이 기적을 부를줄은 꿈에도 몰랐었다...결국 1987년 우린 자유가되엇다...하지만 그당시 난 아버지와 작은누나 모두 같은형제복지원에 있었지만...나만 소년의집으로 이송되었다..


그후 1997년 이 되도록 가족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었다....정신병원에 아버지와 작은누나가 있다란 말도 큰누나를 찾으면서 큰누나에게 듣게 되어 알게되었을뿐이였다...

 

나 라에서 형제복지원이란곳에 20여억을 투자해주면서 정작 나와 가족 원생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마음의 아픈상처만을 가지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왜 나라에서 세금을걷어 그런곳에 20억을 지원해주면서 또 박원장이란 작자에게 훈장을 주면서 그곳에 삶은 한번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나같은 사람이 받은 피해보상은 안해주는건가...내어린 유년시절 지금도 생각만해도 치가 떨릴정도이다.....

 

부모가있어도 부모에게 정을 받지 못하고...나라에서 조차 나를 버렸다...
여러분의 아들딸들 이글을 읽어 본후 사소한 일로 자녀들과 다투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잘못된일이 있다면 따끔하게 혼도 내야 하고...오냐오냐 키우면 버릇이 없어집니다...또 자녀들은 부모님이 간혹 마음을 몰라준다 하더라도 부모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일들은 없었으면 합니다....여러분들은 행복하십니다...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여러분보다 더 불행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여러분들 희망을 포기 하지 마십시요....

 

세상이 힘들다 하여도 희망이라는 단어는 버리지 마십시요....희망을 버린자는 12가지의 복이 사라지고 희망이라는 단어를 포기 하지않고 끝까지 지니고 있는사람은 12가지 복이 들어온다고 하였습니다...모두 사랑하세요....


형제복지원에서 살아온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