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Vocal Battle/슈스케, 위탄, 케이팝스타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 듣기 + 김광석 먼지가되어 듣기 가사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 듣기 '슈스케4최고의무대'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 다들 들어보셨나요? 놓치면 아니아니 아니되는 무대 입니다. 와우정말 멋졌어요.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는 둘의 가능성과 매력을 한껏 보여준 무대 였습니다. 두번 세번듣고 박수 쳤습니다. 슈스케4 정준영 로이킴의 먼지가되어 콜라보미션은 기대 이상의 최고였습니다.

 

로이킴 먼지가되어 부르기전 대화장면

슈퍼스타K 4(슈스케4)에서 화제의 참가자 정준영과 로이킴이 슈퍼위크 현장에서 탑10으로 가기위한 관문인 라이벌 데스매치를 진행했는데요. 글 마지막에 동영상 링크 걸어놨으니 꼭 들어보시고 두번들어보세요. 두사람은 정준영과 로이킴은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를 준비했는데요. 로이킴 먼지가되어를 선곡하고 정준영 먼지가되어 편곡을 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의 기대를 뛰어넘는 최고의 무대를 꾸며 심사위원의 극찬이 이어졌고.. 그 결과에 따른건 극찬 뿐만이 아닙니다..

 

정준영 먼지가되어 부르기전 모습

더욱 놀라운 결과는 심사위원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를 너무나 만족스럽게 들은 심사위원들은 둘중에 한명이 무조건 떨어져야 하는 무대이지만, 슈스케 무대 최초로 보류가 선언 되었습니다. 이승철씨까지 "조금 더 생각하는 시간을 갖자"고 결정을 미룰 정도로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 무대는 매우 멋있었습니다.

이번 슈스케4 콜라보미션중에는 비교대상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치 섞이지 않을 것 같던 물과 기름 같은 두사람이 완벽하게 하모니를 이루며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만들어낸 불꽃놀이 같은 무대 였습니다.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 배틀장면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두사람. 하지만 훈남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정준영과 로이킴. 라이벌구도가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너무나 궁금하구요. 저는 정준영 로이킴 먼지가되어를 듣고나니 둘중 누구도 떨어져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두사람다 성공적인 슈스케 프로그램을 위해서는 필요한 매력있는 케릭터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훈남 라이벌이 멋지게 부른 먼지가되어 동영상 링크해 드립니다. 즐감하세요


그리고 원곡인 김광석 씨의 먼지가 되어 들어보시죠.. 김광석씨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김광석 먼지가 되어 가사

 

故김광석 - 먼지가 되어

(수정) 가사 공유가 저작권 침해라고 해서 삭제합니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김광석에 대하여

 

김광석 먼지가되어

실패와 성공을 딛고 자신의 음악세계 구축
95년 한국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리메이크'(기존 노래를 리듬이나 박자를 바꿔 다시 부르는 노래)선풍이 일기 2년전에 김광석은 3집의 성공을 잇는 「다시 부르기1」앨범을 발표한다. 노찾사와 동물원 시절에 부른 노래들과 김민기에 의해 이루어진 「겨레의 노래」속에 담겨 있던 「이등병의 편지」를 담은 이 음반을 통해 김광석은 「거리에서」의 세계와 모두 자신이 속해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가 추구해 나아갈 것임을 암묵적으로 밝힌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그리고 짙어 가는 비관주의에 대한 몸부림을 형상화한 「일어나」를 머리곡으로 내세운 94년의 네 번째 앨범과 김민기 시대의 포크 사운드 (「바람과 나」,「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에서 김의철, 이정선, 백창우, 김목경으로 이어지는 포크의 흐름을 하나의 앨범으로 재정렬한 「다시부르기2」는 그가 90년대 한국 모던 포크의 진정한 계승자로서의 자리 매김을 감행한 역작들이다. 이 두 앨범을 통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과제를 온 몸으로 승인한다.

그가 만든 「일어나」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이십년 전의 청년문화에 대한 90년대의 응답이며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회귀」(황난주 작곡)와 「서른 즈음에」(강승원 작곡)는 그의 또 하나의 방향인 존재에 대한 성찰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10여년 만에 마악 자신의 자리를 찾은 바로 이지점에서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수 없게 되었다. 그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이는 것은 그가 그 동안 수행해 온 수많은 성과보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후의 관문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음악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자격을 지닌 거의 첫 번째 인물을 영원히 잃은 것이다.
그동안 수행해 온 수많은 성과보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후의 관문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음악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줄 자격을 지닌 거의 첫 번째 인물을 영원히 잃은 것이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소극장 노래운동을 주도한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
그렇다고 해서 한국 대중음악의 80년대와 90년대에 있어서 그의 의미가 사소한 것으로 제쳐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90년대에 이르러 더 이상 소망스러운 공간이 되지 못하고 힘없이 퇴조해 간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의 문화를 움켜쥐 중흥의 자양분을 공급했던 것만으로도 평가받아야 한다. 나아가 '더 이상 나의 음악을 포크로 보지 말라'는 강박관념에 기인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댄스 뮤직과 발라드에 밀려 거의 사멸해 가던 모던 포크의 불꽃을 되살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대중음악사적 과제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최근의 두 앨범, 즉 네 번째 정규 앨범과 두 번째 '다시 부르기' 앨범은 음악적 정체성 확립을 향한 최선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외롭기 그지 없었던 그의 홀로서기는 미완으로 끝이 났고 그의 과제는 극히 전망하기 어려운 후계자들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김광석의 이름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84년 김민기가, 대학가 노래운동의 주역들을 규합하여 만든 합법 음반『노래를 찾는 사람들1』의 '남자들' 목소리의 일원으로서 였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그러나 그의 비범한 가창력은 그 이후 노래운동의 공연장에서 곧바로 증명되었고(가령 비합법 실황음반「또 다시 들을 빼앗겨」에 수록된「이 산하에」같은) 87년 6월항쟁 직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던 노찾사의 첫 번째 공식 공연에서 그는 「녹두꽃」으로 가득찬 관객들을 열광시켰다.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직업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노찾사가 아니라 대학가의 또다른 감수성을 형상화한 그룹인 동물원이었다. 김창기. 유준열 등 재기 넘치는 청년들이 결집한 동물원은 88년의 데뷔 앨범과 그것의 성공을 이어간 이듬해의 두 번째 앨범을 통해 정치적 전복의 감수성이 닿지 못한 또다른 대안 요청의 빈 공간을 채웠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거리에서」와「변해 가네」「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혜화동」 같은 노랭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일상적 구체성과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명징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던 주류 대중음악의 작은 대안이 된다.


김광석은 이 그룹의 간판 보컬리스트로서 1집의「거리에서」와 2집의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를 통해 대중음악가로서의 카리스마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특히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한국 포크 록의 기념비적인 노래를 보컬리스트로서의 김광석의 깊은 시정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곡이다. 동물원 시절의 이 '작은 아름다움'의 노선은 그가 솔로로 전향한 이후의 그의 음악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따라서 80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솔로로 데뷔한 뒤의 그의 음악적 과제는 결국 노쁹사와 동물원의 음악적 이념을 발전적으로 결합하는 작업이 될 것임은 거의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의욕적으로 여섯 곡의 자작곡을 수록한 그의 데뷔 앨범은 그러나 어정쩡한 것이었고, 비제도권과 제도권을 통틀어 질주해 온 그의 여정은 잠시 점검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슬픈 우연」은 평범한 주류 문법의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고 「내 꿈」은 아직 찾아지지 않았으며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줘」는 열림의 에너지를 분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최초로 닥쳐 온 이 시련을 걷어 버리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91년의 두 번째 앨범의 「사랑했지만」을 내세워 이른바 스타덤에 올라섰고 쉴 새 없는 소극장 공연을 통해 '통기타 정신의 파수꾼'으로서의 트레이드마크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이미 많은 후퇴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 앨범의 대부분을 다른 작곡가의 것으로 채웠고, 「사랑했지만」의 뒤를 잇는 「꽃」(「광야에서」의 작곡가 문대현의 곡) 역시 앞의 곡과 균형을 이루진 못했다. 다만 뒷면의 머릿곡이자 유일한 자작곡인 「슬픈 노래」만이 희망을 유예시키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두 번째 앨범의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모던 포크의 핵심을 향해 신발끈을 조여 맨다. 세 번째 앨범에 임한 김광석의 전략은 김민기의 후예들이자 70년대 말의 대학가 노래운동의 숨은 주역들인 한동헌과 한돌의 소박하고 건강한 미의시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행진곡의 리듬과 과격한 정치선동으로 무장한 저항가의 원심력에 밀려 '소시민적'이라는 딱지를 받고 밀려나 있었던 「나의 노래」와「외사랑」, 그리고 「나무」는 김광석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무대에 다시 나타난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음유시인적 이미지가 완전히 정착한 것도 이 지점이며 서구 대중음악의 영향 아래 때마침 일기 시작한 '언플러그드'(전자악기 소리를 배제한 노래) 열풍은 기존의 언더그라운드 이미지에 더욱 빛나는 훈장을 그에게 달아 주었다.

'민중의 가객'이 되길 바랬던 가수
김광석의 노래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가로지른 심연의 혼돈 속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는 저 70년대부터 대항문화의 이름으로 대학가에 복류해 온 통기타의 자유주의 정신이 밑그림을 이루고, 80년대라는 거대한 함성에 대응하는 신서사이저의 음향이 새로운 음악의 집단적 경험을 제련해 나아갈 즈음 그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미지의 무한경쟁으로 치달은 90년대에 이르러 그는 달랑 남은 기타와 하모니카를 두른 몸으로 이미지의 유령들과 외로운 백병전을 전개했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따라서 80년대 전반 서울지역 대학의 노래동아리인 '연합 메아리'에서 '새벽', 그리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의 활동에 이어 그룹 '동물원'의 보컬리스트로 전신했다가 마침내 직업 음악인이 된 그의 어깨에 걸린 노래운동이라는 전력과 모던 포크라는 음악적 과제는 힘겹기 그지없는 화두였다. 80년대의 비합법, 혹은 혹은 반합법 공연에서 그의 「녹두꽃」과「이 산하에」에 매료된 진보적인 대중들은 그가 김민기와 한돌, 그리고 정태춘으로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 내려온 '민중의 가객'이 되어 주기를 희망했으며 사랑타령과 탈인간적인 기계적 리듬의 범람에 휩쓸려 버린 비판 정신의 담지자가 되어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김광석은 전투적인 예술가가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모던 포크의 가장 중요한 전제인 싱어송라이터(자기 자신이 직접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요건을 완벽하게 갖추지도 못했다. 그의 대중적 명성을 결정지은 노래 역시 동물원의 데뷔 앨범의 첫머리에 실린 「거리에서」(김창기 작곡)과 그의 솔로 2집을 견인했던 「사랑했지만」(한동준 작곡) 같은 풍부한 울림과 짙은 시정을 동반한 '러브 발라드' 음악이었던 것이다.

김광석 먼지가되어
우리를 떠난 일상의 시정과 통기타의 비판정신
민중가수 김 광석이 우리 곁을 떠났다. 노래패  새벽 의 일원이었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창단 멤버였던 그는 「녹두꽃」과「이 산하에」를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불렀던 가수다. 그룹 동물원을 통해 대중적으로 성공했고 그 후 독립해서 통기타 하나로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새로운 물결 형성을 위해 싸웠다.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그의 육체는 한줌의 재로 변했지만 그의 노래는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출처 http://soilsmell.x-y.net > 김광석과 음악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