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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유묵 작품들 모음 / 유묵 목록 박근혜 안도현



안중근 유묵 이슈입니다. (유묵이란 생전에 남긴 글이나 그림을 말합니다.)갑자기 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화제가 되고 있는 걸까요? 그건 안도현 시인과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있는데요

대선 기간 당시 안도현 시인이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소장하고 있다는 글을 올리게 되면서 논란이 있었는데요. 그 안도현 시인이 검찰에 출두하면서 안중근 유묵이 다시한번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안중근 유묵 소장 의혹을 SNS를 통해서 알리게 됐습니다. 

이에 전주지검은 안중근 유묵과 관련해 피진정인 신분으로 검찰에 출두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도현시인이 검찰조사를 받기 전에 기자회견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린 것 때문에 부른 것으로 알고 있다. 

글을 올리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가 올린 내용은 이미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고 학술지에 발표된 내용이다"고 검찰 출두요청에 응하며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전 출석 요구를 받은 안시인은. 당당하게 조사를 받겠다면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관련해서는 당시 박 후보 측에서 '본적도 없고 소장한 적도 없다'는 게 해명의 전부였다. 사적 유품도 아니고 국가 유물이자 보물인 중요한 유적을 한마디 말로 넘기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짧게 말씀 드리자면, 안시인이 안중근유묵 소장을 이야기 한것때문에 검찰에 출두한게 아니라, 당시가 대선기간이었고,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기 떄문에 선거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하네요.

헌법재판소에서 SNS를 사용한 선거운동은 위헌이라는 결정이 나왔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번 일이) 오히려 국민의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간섭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고  짧게 이야기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 유묵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백인당중유태화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泰和)은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라는 뜻이다. 인내를 강조한 내용으로 선현들의 구전글귀중 하나이다. "한결같이 부지런히 일하는 세상에는 어려움이 없다(一勤天下無難事)"와 짝을 이루는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은 안중근 의사 자신의 명언으로'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뜻

평생의 경구가 될 만한 말이다.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돋을 것이라는 지극히 쉬운 얘기를 애써 순국 전에 조선민족에게 남겼으니 배움에 대한 철저한 사상을 보여준다.

 

년년세세화상사세세년년인부동

년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年年歲歲花相似歲歲年年人不同)은 '해마다 계절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은 같지 않고 변하네' 자연의 섭리는 그대로이나, 세월따라 사람들은 변하고 있다는 당시의 암울한 현실을 걱정하는 구절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

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은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가난하고 천한것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안의사의 인생관이 반영된 말이다.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

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개정략불개진가련(東洋大勢思杳玄有志男兒豈安眠和局未成猶慷慨政略不改眞可憐)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칠언절구의 자작시

 

 

견리사의견위수명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 여기서 견리사의(見利思義)와 견위수명(見危授命)은 안중근 의사가 100년 전에 여순 감옥에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자신의 철학과 심경을 피력하였던 간절한 마음이 읽혀지는 내용

 

 

용공난용연포기재(庸工難用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다루기가 어렵다) 자신의 능력을 생각하지 못하고 설쳐대는 사람에게 경계가 되는 말

 

 

 

인무원여 난성대업(人無遠慮 難成大業,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기 어렵다'는 것

 

 

오로봉위필청천일장지삼상작연지사아복중시(五老峯爲筆靑天一丈紙三湘作硯池寫我腹中詩)는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자작시 오언절구 한 수를 쓴 것

 

 

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는 1910년 3월 항일투사 안중근 의사가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

 

사군천리이표촌성망안욕천행물부정

 

 

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丈夫雖死心如鐵義士臨危氣似雲)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장부는 비록 죽더라도 마음은 쇠와 같으며, 의사는 위태로움에 닥치더라도 기운은 구름과 같다'라는 뜻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라)는 안중근 옥중에서 남긴 글씨

 

제일강산(第一江山)은 1910년 2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가볼 수 없는 조국강산에 대한 그리운 심정이 나타나 있다. 안중근이 금강산을 비롯한 조국강산을 천하제일의 강산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청초당(靑草塘)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체 하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 폭 74.9cm, 길이 39.7cm. 평소 남에게 과시하지 않는 안의사의 겸손한 성품이 표현된 휘호

 

인지당(仁智堂)

 

인내(忍耐)는 1910년 3월에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

 

 

극락(極樂)은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로 더없이 안락해서 아무 걱정이 없는 경우와 처지 또는 그런 곳을 바라는 마음으로 "극락(極樂)"을 쓴 것으로 보여진다

 

운재(雲齋)는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이다. '운재(雲齋)'라는 제호(齊號)를 쓴 것인지는 알길이 없으나 운재(雲齋)는 구름이 걸려있는 누정(樓亭,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의미)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름날 비온 뒤에 가끔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모습

 

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欲保東洋先改政略時過失機追悔何及)은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남긴 글씨

 

유묵(遺墨:살아있을 때 남긴 글이나 그림)은 러일전쟁(露日戰爭) 당시 전의(典醫:대한제국 때 태의원에 딸린 주임의 벼슬. 네 명이 있었음)로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나자 만주 여순(旅順:중국식 발음으로는 뤼순) 감옥으로 전근되어 근무하던 오리타 타다스(折田督)가 1910년 3월 안중근(1879∼1910) 의사의 친필을 옥중에서 받아 간직해오던 것을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인 오리타 간지(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으며 오리타 간지의 손에 의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안중근이 1910년 3월 옥중에서 쓴 행서 글씨 두 폭이다. 그 가운데 한 폭은 오른쪽 위에 "증안강검찰관"이라 쓰여 있듯이 안중근 의사가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의 취조를 담당했던 여순검찰청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찰관에게 써준 것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안중근이 공판정을 왕래할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헌병 치바 도시치 간수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치바는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뒤 자진하여 제대했는데, 그가 사망하자 안 의사의 유묵은 그의 부인과 조카딸 미후라에 의해 보관되었다가1980년 8월 23일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을 통해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라는 뜻이다.[6] 1910년 3월 안중근이 옥중에서 남긴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