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1절입니다 다들 이쁜 우리나라 국기 다셨나요?^^
우리가 이렇게 컴퓨터 앞에서 즐겁게 앉아있을 수 있는것도
나라를 위해 몸바친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잠시라도 묵념을 하는건 어떨까요?
재미있는 기사를 봤는데요 고문기술자인 하판락이라는 인간에 대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에 나온 기사인데 글을 쓴 저자는 지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이하 '친일 재산조사위')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하판락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하빈다. 바로 '친일 반민족행위자 하판락'
하판락 최후의 친일파이자 고문귀신
일본 경찰보다 더 악랄했던 조선 순사 '하판락'
저자는 친일 재산조사위에서 일할 당시에,, 새로운 사건에 관해 조사과에 배당되면서 한 악랄한 인간을 알게됩니다. 저자에게 배당된 친일 대상자는 바로 '하판락'이라는 일제 강점기 친일 경찰이었다고 합니다.
하판락이라는 이름이 독특하다고 생각된 저자는 '국가귀속 대상 재산 목록'을 살펴보면서 하판락에 대한 자료 조사를 해나가는데요. 처음에는 하판락에 대한 자료를 둘러봐도, 대상 재산을 전부 다 합쳐도 얼마 되지 않는 평수였고 그나마 하천부지라서 사실상 재산적 가치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처음엔 하판락에게 그다지 마음이 가지 않았고 굳이 이런 사건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떄.. 그런 생각을 완전히 바꿔준것은 하판락의 친일 행각이었습니다.
하판락은 1912년 생으로, 경남 진주 출생입니다. 하판락은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2월 처음 순사로 일제 경찰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 하판락은 앞으로 엄청나게 악랄한 고문귀신이 됩니다.
하판락이 사천경찰서를 거쳐 38년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고등 경찰로서 '고문 귀신'이라는 악명을 떨치며 독립투사들의 치를 떨게 했는데요.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시대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고문귀'가 그의 별명이 붙었을까요
하판락이 고문귀신이라는 악명을 얻게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 였다고 합니다.
당시 하판락에게 무참하게 고문당한 김준기씨 증언에 따르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말못할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하판락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낀 김준기씨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습니다.
저자가 하판락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팔수록 하판락은 기가 막힌 인간이었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이런 자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을정도로 악랄 했다고 합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습니다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한 고문에 대한 것인데요.
고문경찰 노덕술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헀고, 여경수가 끝까지 버티자 그의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졌다고 합니다. 살이타는 고통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중 최상단에 위치할 정도로 심한 고통인데요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라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을 끝없이 했고, 결국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끝내 절명했다고 하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 역시.. 살아도 사는게 아닌 신체 불구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판락에게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니 생지옥이 따로 없지 않았겠습니까… 아이러니 한것은 하판락이라는 악마는 잔혹한 고문 덕에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이광우 선생은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 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우 선생은 하판락이 가한 '착혈 고문'을 고발했습니다. 착혈고문이란것을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처음알았는데요. 세상에 이런고문을 생각해냈다는 그 자체가 너무 소름끼칠뿐입니다..
1943년, 하판락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심문이 이어지지 않자,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착혈고문을 시작했는데요, 혈관을 통해 피를 뽑아서 주사기 하나 가득 차면, 하판락은 뽑아낸 피를 자신이 고문하던 이미경을 향해 뿌렸다고 합니다.
아직도 이런 더러운깃발을 그리워 하는 이가 있겠죠
그리고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한다고 하는데요.. 사람이 정말 이런짓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런 악마같은 고문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서 여경수 등 독립투사 3명이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신체 불구자가 됐다고 합니다.
하판락의 고문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폭로한 이광우 선생은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기 위한 증거 수집차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친일인명사전 앱도 있군요?
그럼 해방후에 그 악마같은 하판락은 어떻게 됐을까요???
해방후에 경험있는 경찰인력이 필요한데 그 경험있는 경찰이란 일제시대에 친일경찰들 밖에 없었지요.. 그렇기에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고 합니다. 해방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하면서 어꺠에 힘을 주고 다녔고,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판락은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고 하니 이 무슨 억울하고 기가막힌 운명의 장난입니까….
하판락 최후의 친일파이자 고문귀신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 1년. 하판락이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체포된적이 있다고 합니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하판락을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에 하판락이 잡혔다고 하는데요. 하판락이 얼마나 악랄했던지…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였다고 하니, 당시 그를 아는 사람들의 분노가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악마 하판락은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끝까지 자기의 잘못을 부인했고,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하판락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요…
세상은 동화처럼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하판락은 친일 고문형사로서 형성한 재산과 일제가 끝난후 미군정아래서 착복한 재산을 가지고 사업가로 변신해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2003년 9월까지 향년 92세의 천수까지 누리며 살다가 떠났다고 하니.. 글을 읽는 제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어이가없고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친일파가 바로 하판락이었으니…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94주년 3. 1 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아 마음을 다해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우리가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할 오늘 어울리는 글을 포스팅 해봤습니다.
저는 아직도 머리가 멍하네요… 뭘 더 써야할지… 하판락이라는 이름은 평생 못잊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을 못봤더라면 전 이 괴물의 존재조차 몰랐겠죠… 다른 사람들도 많이 읽었음 합니다. 특히 어린친구들이요